“보석 같다” 외국인도 송가인도 반하게 만든 30대

9430

거창유기 4대 계승자 이혁 이사
옻칠한 유기부터 유기 주얼리까지 제품 다양화
“쓰임 잃으면 가치 훼손되고, 단절된다고 생각”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 기술을 연구하던 엔지니어였다. 만도 글로벌 연구개발(R&D) 센터에서 브레이크 기술을 연구했다. 여름에는 뉴질랜드를, 겨울에는 스웨덴을 찾아 빙판길 브레이크 테스트를 했고, 티볼리·에쿠스 등에 들어가는 브레이크를 메인으로 개발했다. 그랬던 그가 현재는 유기 공방의 이사가 됐다. 경남 거창에서 4대째 내려오고 있는 전통 유기 공방 거창유기 계승자, 이혁(36) 이사의 이야기다.

거창유기 4대 계승자 이혁 이사와 3대 계승자 이기홍 대표. /거창유기

이혁 이사가 엔지니어 생활을 접고 거창으로 내려온 건 2015년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유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이 공방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40대까지는 직장 생활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창유기 3대 계승자이자 아버지인 이기홍 대표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그 시기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학사장교로 있던 2010년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습니다.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 갑자기 쓰러지셔서 서울의 병원까지 실려 오실 정도로 위급한 상태였어요. 그때 문득 ‘아버지가 안 계시면 공방을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대량 생산에 밀려 유기 공방 자체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어요. 제가 공방을 이어받을 계획이었던 시기가 되면 이미 공방을 다시 살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2015년 퇴사 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거창유기 4대 계승자 이혁 이사와 3대 계승자 이기홍 대표. /거창유기

◇1924년 시작한 공방, 전통 방식 그대로 유기 제조

거창유기는 1924년 김석이 장인이 거창 지역에 공방을 설립하면서 시작했다. 97년 동안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공방을 이어가겠다는 집념 하나로 현재까지 4대에 걸쳐 공방을 운영했다. 일제가 전쟁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유기 제작 금지령을 내렸을 때도 대부분의 공방이 문을 닫았지만, 끝까지 버틴 덕분에 거창유기는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전통 주물 방식으로 제품을 만드는 모습. /거창유기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유기 제작 및 판매 금지령까지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방이 문을 닫았죠. 현재 거창 인근 지역에는 공방이 4곳 정도 남아있는데, 그것도 김석이 장인의 문하생이었던 할아버지께서 지역 사회에 유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외부에서 모셔오거나 자체적으로 키웠던 장인분들이 거창 지역에 터를 잡은 것입니다.”

전통만 이어온 것이 아니라 유기 제조 방식도 전통 주물 방식을 활용한다. 개토(갯벌토)를 사용해 본을 뜬 뒤 쇳물을 붓고, 열처리와 가질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하나의 제품이 완성된다. 제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살균 소독에 효과적이고 변색도 막을 수 있다. 

“유기 제품(bit.ly/2YS1DVm)의 가장 큰 장점은 살균입니다. 비브리오균을 비롯해 각종 대장균을 없애는 효과가 있어요. 또 보온과 보냉에 우수하고, 신선도를 유지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이용해 육수를 낼 때 고기에서 나는 잡내를 잡아주기도 합니다. 도자기 그릇이 잘 깨지는 것과 비교하면 유기 그릇은 잘 깨지지 않아 관리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도 있죠.”

전통 주물 방식으로 제품을 만드는 모습. /거창유기

◇공방 시스템 정비하면서 일 배우기 시작

역사는 깊지만, 직접 공방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으로 바라본 거창유기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공방이었지만, 현대화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장부는 엑셀 위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재고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홈페이지도 엉망이었다. 10여 년 전 나온 제품에 ‘New’라는 문구가 붙어 있을 정도였다. 소비자들이 홈페이지를 보고 거창유기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뒤로 낮에는 공방 일을 배우고, 밤에는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재고와 판매 관리 장부를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으로 개선했다. 홈페이지도 개편했다. 전통과 함께 세련된 미를 보여주고자 노력했으며 온라인 몰을 만들어 제품 판매 채널도 늘렸다. 내부 시스템 개편이 끝난 후에는 디자인과 신규 제작 기술, 표면 패턴 등 유기에 새로움을 더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유기 제품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다 고만고만해 보이는데 가격대는 차이가 크다 보니까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초기 1년 동안은 전시회나 박람회 등을 모두 쫓아다니면서 현재 나오는 제품 트렌드는 무엇인지, 사이즈와 형태는 어떤 게 좋고, 제품 구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배웠어요.”

거창유기

이후에는 공장에 3D 프린터를 들여놓았다. 기계공학과에 재학하면서, 또 만도에서 일하면서 3D 프린터로 작업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3D 프린터로 먼저 모양을 확인해보고, 작업장에서 유기 제품으로 만들어보는 과정을 반복했다. 두께와 무게를 조절해가면서 제품을 새로 만들어보고 또 버려가면서 디자인과 사이즈를 다양화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 나갔다.

“공방에서 일 년 동안 신제품이 10개 나오면, 그 이전에 한 100개 제품을 만들어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만큼 신제품 개발에 힘을 쏟고 있지만, 실제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되는 제품은 극히 일부분이죠. 하지만 그렇게 버려지는 작품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보석 같다’며 외국인들이 관심 보이기도

이 이사는 유기 표면에 은도금을 얹거나 삼베 문양을 입히는 등 다양한 기법을 적용한 거창유기만의 새로운 유기 제품을 선보였다. 제품 차별화를 위해 옻칠도 배웠다. 한국의 전통 염료를 찾던 중 옻칠을 떠올렸고, 이를 이용해 유기에 색감을 입혀보자는 아이디어였다. 그길로 서울을 찾아 옷칠 회화로 유명한 정상엽 작가에게 옻칠을 배워 옻칠 유기 제품(bit.ly/2YS1DVm)을 탄생시켰다.

(왼쪽부터)유화를 접목한 접시와 1인 반상기, 옻칠을 접목한 옻칠 유기 잔. /거창유기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연구하고 개발한 이혁 이사의 노력은 각종 공모전 수상으로 이어졌다. 2019년에는 유기 2인 식기세트가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에 선정됐다. 이에 앞서 차기 세트, 빙수와 죽 세트, 삼베 무늬 식기 등도 2017년과 2018년 대한민국 우수공예품으로 지정됐다. 2018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박람회 ‘메종&오브제’에 참가해 부스를 꾸리기도 했다.

“금도 은도 아닌 오묘한 유기의 색을 보고 어떤 금속인지 궁금해하는 외국인들이 많았어요.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금속이라고 소개하면 신기해하고,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놋그릇을 보고 ‘보석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메종&오브제를 기점으로 해외에 있는 한식당이나 프랑스 내 특급 호텔들, 미슐랭 식당 등에도 유기 제품을 도입했습니다. 지금까지도 프랑스·미국·대만 등 7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어요.”

해외 전시회에서 유기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거창유기

◇20·30대 공략 위한 유기 주얼리 라인 출시

디자인뿐 아니라 제품 다양화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유기로 만든 송가인 굿즈를 출시해 화제를 모았다. 팬 연령층이 높다는 점을 고려해 송가인 친필 사인을 넣은 술잔과 수저 세트를 선보였다. 앞서 신화의 20주년 콘서트를 기념한 유기 주얼리 세트를 제작해 완판시키기도 했다.

“우연히 신화 굿즈를 만들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기존에는 없었던 제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유기 제품을 굿즈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였던 만큼, 제품도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죠. 고민 끝에 주얼리를 떠올려서 반지와 목걸이, 팔찌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온라인과 동시에 콘서트가 열린 올림픽경기장 앞에서 제품을 판매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주변 통행에 방해된다고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었어요.”

신화 20주년 기념 굿즈(위)와 송가인 굿즈(아래). /거창유기, 채널A 방송화면 캡처, 송가인 인스타그램 캡처

이후 유기 주얼리 제품은 꾸준히 생산 중이다. 유기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유기를 알리기 위해서다. “유기라는 소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유기가 식기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쓰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 꾸준히 주얼리 라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사실 20대분들은 유기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식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유기도 접하게 되는 데 그 시기가 보통 30대 이후거든요. 그래서 유기 주얼리(bit.ly/2YS1DVm)가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에 좋은 제품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쓰임 잃으면 가치 훼손된다고 생각···렌탈 서비스 선보여

수공예 유기 제품을 사용하고 싶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유기 렌탈 서비스도 시작했다. 3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소유권이 전환되는 방식이다. 어떤 제품을 렌탈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약 20개 제품을 장기 렌탈한다고 가정했을 때 한 달에 드는 비용은 4만~5만원 정도로 저렴하다. 

“사실 렌탈 서비스는 수익이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유기가 쓰임을 잃어가기 시작하면 가치는 훼손되고, 단절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분이 유기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렌탈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주얼리 제품 사진. /거창유기

이혁 이사는 지난해 문화체육부 산하 기관인 사단법인 한국무형문화예술 교류협회가 인증하는 유기 종목 명장으로 선정됐다. 한국무형문화예술 교류협회는 무형의 문화적 유산을 전승하고, 창조정신을 더해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사람에게 명인과 명장 칭호를 부여하고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유기 공예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유기 공예가 단순히 공예가 아니라 전통과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또 식기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유기 제품이 활용될 수 있게끔 제품을 만들어나갈 계획이에요.”

-목표는.

“유기뿐 아니라 공예업계 전반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요. 국내에서 제 살 깎아 먹을 게 아니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한국 공예의 세계화를 이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K팝을 시작으로 한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요. 한식과 함께 식기 제품도 해외로 널리 뻗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 공예 업계를 한층 성숙하고 경쟁력 있는 시장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글 CCBB 라떼

img-jobsn

2 코멘트

회신을 남겨주세요

귀하의 의견을 입력하십시오!
여기에 이름을 입력하십시오.